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전 국회의원·정치인이다. 서울특별시 출생이며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문국현 나이 고향 학력 이력 논란 프로필
문국현
文國現 | Moon Kook-hyun
출생
1949년 1월 12일 (73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성북동
(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본관
남평 문씨
학력
중동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 / 학사)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혈액형
O형
종교
무종교 → 천주교(세례명 : 그레고리오)
병역
학군사관후보생(ROTC) 10기(중위)
배우자
박수애
자녀
장녀 문지영, 차녀 문지원
현직
뉴 패러다임 인스티튜트 대표이사
한솔섬유 CEO
약력
제18대 국회의원(서울 은평구 을)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
KT 사외이사
창조한국당 대표최고위원
창조한국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선진과 창조의 모임 원내대표
김광수경제연구소 고문
문국현 생애 학력 이력
1961년, 서울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동성중학교(서울), 1967년 중동고등학교, 197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197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5년부터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 킴벌리 클라크 동아시아 총괄사장직, 그리고 KT 사외이사직으로 있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2007년 8월 23일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다. 10월 30일 새로 창조한국당을 창당하고 11월 4일 대선후보로 추대됐고, 유효득표의 5.8%를 득표하여 낙선했다. 하지만 주요 후보들의 소속 정당 및 이름을 가리고 공약으로만 평가하는 Blind Voting에서는 비록 인터넷 이벤트였을지언정 당당하게 1위를 차지, 정책의 경쟁력이 매우 강한 후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정치권의 대안으로 젊은층의 지지를 받았던 점에서 훗날의 안철수가 막 정치권에 진입했을 때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안철수는 정치 진입 초창기 문국현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대선출마를 선언했으나 서울 강남에서 부동산 거래로 약 20억의 시세차익을 거둔 사실이 드러났고, 또한 2004년에 본인의 전원주택을 신축하면서 농지를 영농 목적으로 구입한 후 불과 한 달 만에 용도변경허가를 신청한 것까지 알려지게 되어 도덕성에 의구심을 지니게 했다.
게다가 두 딸이 모두 비정규직이어서 약자의 아픔을 안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나, 막상 선관위에 신고한 재산 내역에서 증여세를 납부하지 않은 상태로 두 딸에게 약 6억원 가량의 현금과 주식이 분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에 문국현의 선거운동본부에서는 "펀드매니저의 조언에 따라 재산 분할관리를 했을 뿐"이라며 변명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걸 대선 출마 직후에야 본인의 명의로 황급히 환원시킨 사실이 밝혀져 본인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며칠 후에는 또 "아이들의 혼수를 생각해서 그랬다”며 사실상 증여를 시인하는 등의 말바꾸기가 이어지며 상당한 지지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정계진출 이전 시기에 토론에 참여해 보수논객으로 이름을 얻은 정규재 한국경제 주필의 송곳 질의를 확실하게 논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제 전문가의 위엄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미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1위였고 그 남은 자리를 정동영이 차지한 상황에서 대중에 비춰지는 기회가 현저하게 적어 후보 본인을 알릴만한 기회도 없었다. 다만 선거 당시 여권에서 후보 단일화 제의를 하며 손을 내밀기도 했지만 끝까지 제3의 길을 고수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요소다.
결국 개표 결과 5.83%라는 아쉬운 득표율로 대선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있었다면 출구조사 결과 20대에서는 15.9%라는 상당한 득표율로 3위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이명박도 정동영도 불신하는 당시의 20대들에게 문국현이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8년에 열린 18대 총선에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창조한국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 48,656표(52.02%)를 득표하여 3선 의원인 한나라당의 이재오 후보를 약 10,492표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2009년 9월 1일까지 창조한국당과 자유선진당의 연합 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의 대표를 지냈다.
2009년 10월 22일, 선관위의 지도를 받아 1%의 이자로 발행한 당사랑채권이 시중 금리(당시 5%)보다 낮다는 이유로 4% 차이만큼 당이 잠재적인 금전적인 이익을 얻은 죄를 물어, 당을 처벌할 수 없으니 자연인인 당 대표를 처벌하였다. 다만, 이유가 이것뿐만은 아니고 저리로 발행한 당채의 매입 당사자 중 1명이 비례대표 상위순번자였다는 게 문제였다. 비례대표 2번으로 공천되어 당선된 이한정 전 의원이 당사자로 이 당채를 6억 원치를 매입했던 것이다. 선관위와 법원은, 저리로 발행된 당채를 하필 비례대표 상위순번자가 매입한 것을 일종의 공천헌금으로 해석했다. 당채의 이율이 시중금리 수준이었으면 문제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사 저리로 발행했어도 당 후보자들이 매입하지 않았으면 역시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대법원 판결에서도 4인의 대법관들이 합의를 보지 못하자 전원합의체로 돌려 9:4로 대법원 전원 합의체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의 형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이재오가 이듬해 재보궐선거를 통해 지역구 복귀에 성공했다. 징역형을 받았으므로 2019년까지 향후 10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돼 사면되지 않는 한 출마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정치에서는 은퇴한 상태다. 해당판례(2009.10.22. 2009도7436)는 형사소송법에서 공소장일본주의와 관련하여, 공소장일본주의의 위반의 효과와 위법의 치유에 대한 리딩케이스이다.
정치계를 떠난 후 2009년부터 김광수경제연구소 고문을, 2010년부터 뉴 패러다임 인스티튜트 대표이사를 지냈다. 2013년부터는 한솔섬유의 사장을 맡고 있다.
2015년 1월에는 캄보디아에 위치한 한솔섬유의 자회사 현지 공장에서 노조 간부들이 무더기로 해고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문국현 여담 일화
2007년 대선 후보 당시 조선일보에서 진행한 문답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로 원더걸스를 꼽았다.
17대 대선 당시 인터넷의 진보 성향 커뮤니티에서는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당시 20대들이 자주 가는 인터넷 카페와 홈페이지들을 중심으로 문국현 지지를 호소하는 글이 넘쳐났고, 디시인사이드에서는 본인의 이름 갤러리인 문국현 갤러리가 만들어질 정도로 인터넷에서 열광적인 반응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해 붙은 별명이 바로 '인터넷 대통령'. 이명박도 정동영도 불신하는 당시의 20대들에게 문국현이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대 대선에는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 본인은 입당하지 않았지만 창조한국당 해산 후에 대부분의 인사들이 민주통합당에 입당한 것에 영항을 받은 듯 하다.
문국현 선거 이력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375,498 (5.83%) 낙선 (4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48,656 (52.02%) 당선 (1위)
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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