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선 국회의원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인. 제16대 국회 상반기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정치인 홍사덕 나이 사망 학력 고향 경력 프로필
홍사덕
洪思德 | Hong Sa-duk
출생
1943년 3월 5일
경상북도 영주군 순흥면 내죽1동 속수마을
사망
2020년 6월 17일 (향년 77세)
본관
남양 홍씨 토홍계
재임기간
제24대 정무 제1장관
1997년 8월 5일 ~ 1998년 3월 1일
제16대 전반기 국회부의장
2000년 6월 5일 ~ 2001년 6월 4일
배우자
임경미
자녀
아들 홍재선, 장녀 홍은진, 차녀 홍세나
학력
순흥국민학교 (3학년 / 전학) → 영주국민학교 (졸업)
영주중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졸업 / 13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해병대 일병 귀휴 (130기 / 단기학보병)
종교
개신교
경력
중앙일보 기자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롯데 평화건설 기획실장
신한민주당 대변인
제11대 국회의원 (경북 9선거구 / 민주한국당)
제12대 국회의원 (경북 영주시·영풍군·영양군·봉화군 / 신한민주당)
민주당 부총재
제14대 국회의원 (서울 강남구 을 / 민주당)
제14대 국회 후반기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제15대 국회의원 (서울 강남구 을 / 무소속)
제24대 정무제1장관 (문민정부)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2번 / 한나라당)
제16대 국회 전반기 국회부의장
한나라당 원내총무
친박연대 선거대책위원장, 비상대책위원장
제18대 국회의원 (대구 서구 / 친박연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박근혜 정부)
홍사덕 생애 고향 학력 이력
정계 입문 전
1943년 3월 5일 경상북도 영주군(現 영주시) 순흥면 내죽1리 속수마을에서 아버지 홍난유(洪蘭裕, 1923. 3. 9 ~ 1969. 3. 26)와 어머니 반남 박씨(1926. 3. 14 ~ 2017. 10. ?)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순흥국민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 때 영주국민학교로 전학해 졸업했고, 이후 영주중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를 졸업하였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 대한민국 해병대에 병 130기로 입대해 해병대사령부 의장대에서 의무복무하였다. 졸업 후에는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일하였고, 한국기자협회 부회장도 지냈다. 명지대학교와 숭전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75년 4월 23일, 중앙일보 기자로 있을 당시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과 관련해 IPI(국제신문편집인협회)와 IFJ(국제기자연맹)에 '한국의 현 언론 사태에 관한 보고서'를 보내려다 발각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다.
전성기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상북도 영주시-영풍군-봉화군-영양군 지역구에 민주한국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오한구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84년 말 서석재, 박관용, 김찬우, 허경만, 김현규, 손정혁, 최수환 등과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같은 해 신한민주당 대변인이 되었다. 이민우 총재의 측근으로 활동했는데, 이민우 구상이 홍사덕의 아이디어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찬종, 이철, 허경구, 조순형, 장기욱 등과 함께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 양쪽 모두에 합류하지 아니한 채 야권 단일화를 주장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로 옮기고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이태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꼬마민주당에 합류하였고, 야당이 통합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강남구 을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의 대변인을 맡았다. 이 때의 인연으로 김대중과 친분이 각별했으며, 한때는 동교동계 주변의 몇 안되는 영남 출신으로서 당내에서도 입지를 얻었다. 1994년부터 1996년까지 국회 환경노동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조순, 조세형, 이철 후보와 맞붙어 3위로 낙선했다.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갔다가 바로 탈당하였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같은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4선 의원이 되었다. 같은 해 지금 잠이 옵니까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1997년 김영삼 정부의 정무제1장관에 임명되었다.
2000년 이후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역주의 및 1인 보스정치 타파를 기치로 내걸며 새정치를 표방해 여전히 삼김시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정치계에서 신선함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당시만 해도 상대적으로 젊고 스마트한 이미지에 강남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직을 따낼만큼의 파워도 있었던 홍사덕의 새정치 표방은 많은 재야인사들을 비롯해 다수의 대중들로부터도 기대를 받았고, 장기표와 함께 무지개연합이라는 신당 창당을 본격 추진하며 기대치가 절정에 올랐으나...
그 시점에서 뜬금없이 한나라당에 입당해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이는 대한민국 정치 역사상 손꼽히는 변절 내지 통수로 두고두고 회자되는데,홍사덕 창당 선언 '작심 1주일' 해당 기사에서 인용된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에 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도대체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던 사람이 이래서야 되겠느냐"라는 기자의 항의성 질문이 당시 정확한 세간의 평가였다. 훗날 권노갑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통일부 장관을 맡고 싶다면서 새천년민주당 쪽과도 접촉했었다고 한다. 최종 발표 직전까지 계속 간을 보고 있었던 듯하다. 어쨌거나 홍사덕은 자신의 정치적 자산이었던 새정치의 참신한 이미지를 이 시점에서 모두 날려먹고 말았다.
지역구는 오세훈에게 넘기고 자신은 비례대표 2번을 배정받아 제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나, 2001년 부의장직을 사임하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2002년 3월 7일자 중앙일보의 대의원 조사에서 지지율이 36.5%으로 53.1%인 이명박에게 크게 뒤처지는 결과가 나오면서 경선을 포기했다. 당시 "이명박이 당내 경선에서 대의원들을 상대로 지나치게 '물량' 공세를 펴는 것에 홍사덕이 크게 분노했다"는 얘기가 돌았고, 홍사덕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서울시장 선거에서 반드시 보여 주겠다"며 무소속 출마를 시사했으나 지도부의 만류로 무소속 출마는 실행되지 않았다.
2003년 한나라당 원내총무(지금의 원내대표)에 선출되어, 이라크 파병하면 한달 동안 사병으로 근무하겠다는 주장을 했다. 당시 파병 결정에 미온적이었던 참여정부를 겨냥한 언사였고 심지어 재입대를 하겠다며 입대 자원서를 제출했으나 병무청 측에선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된다'며 이를 거부했다. 당시 그의 주장에 찬반 논란으로 들끓었는데 ‘홍사덕 이라크 파병 운동본부’가 생겨났고 '10만 명 서명운동'과 '홍사덕 이라크행 비행기 값 모금운동'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2004년에는 한나라당 원내총무로서 노무현 탄핵 소추를 주도하고 그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갑(현 일산동구) 지역구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5년 재보궐선거에서 경기도 광주시 지역구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탈락하였다. 이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정진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의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고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 공천에서 탈락하여 친박연대 후보로 대구광역시 서구 지역구에 출마, 당선된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2008년 한미FTA 비준을 두고 나라가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을때 "민주당에 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을 이번 회기 내에 처리해야 하는가를 놓고 끝까지 가는 토론을 요청해야 한다"면서 "엄중한 시기에 있음을 국민에게 알려주고 여론의 뒷받침을 받아야 국회에서 FTA 비준동의안 처리도 가능하다"며 "의석수로 밀어붙이는 것은 정말 위험천만하다"고 주장했다. 또 "대야기조도 바꿔야 한다"며 "여러 부분에서 야당과 대화하며 협력을 구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안팎으로 어려울 때 대북관계가 긴장 관계에 빠지는 것은 정말 피해야 한다"며 "생존을 위해서 당이 주도적으로 앞장서서 대북 기조를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0년 연평도 포격전 이후에는 "지금과 같은 남북관계는 장기적으로 지속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모두 생각할 것"이라며 "당 대표, 원내대표께서 신임 정책위의장과 상의해 대북 관계 정책을 선도적으로 리뷰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이 어떤가 한다"고 제안하며 남경필, 정두언, 정몽준과 함께 정부 대북정책의 기조 변화를 요구했다.
2011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이 패배한 것에 대해 "엠비(MB) 심판론이 먹힌 것은 시대정신을 담지 못한데서 비롯됐다고 본다”면서 "일본 자민당이 55년간 장기집권했던 것은 사회당과 민사당이 좋은 정책이나 아이디어를 낼 때마다 재빨리 구체화해서 실천했던 덕분이다. 영국 보수당도 마찬가지였다"며 경제, 고용, 대북문제 등에 대해 당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전략공천을 받아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통합당 정세균 후보에 패하여 낙선하였다. 2013년 정치자금법위반죄로 벌금 300만 원과 추징금 3,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2012년 8월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출 100억 달러를 넘기기 위해 유신을 한 것"이라며 "유신이 없었으면 우리나라는 수출 100억달러를 못 넘었을 것", "우리나라가 와이셔츠와 가발을 만들고 쥐와 다람쥐까지 잡아 팔아서 1971년까지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했지만, 100억 달러는 중화학공업 육성 없이는 불가능했다"며 "야당 등에서 유신을 얘기할 때 안 좋은 부분만 얘기하고 좋은 부분은 빼는데 이는 참 비열한 짓"이라고 발언했다가 여야를 막론하고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의장으로 있다가 2015년에 발생한 주한미국대사 피습 사건으로 사의를 표했지만 수리되지 않았고, 정권교체로 물러날 때까지 민화협 대표상임의장직을 수행했다. 2016년 북한 대홍수 사태에 대해 인도적 대북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2017년 정권교체 이후 완전히 정계를 은퇴했다.
홍사덕 사망
2018년 9월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2020년 6월 1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홍사덕 여담 일화
장인은 임문환으로, 일제강점기 때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관료로 일하다가 광복 후 이승만 정부에서 상공부 차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한 후 한국무역협회장을 지냈다. 부산프라자호텔이 임문환 일가의 소유이다.
한나라당 소속이 된 후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이었다. 2004년 1월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같다고 말하는 것은 김 전 대통령에게 큰 결례다”며,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북한의 개혁 개방 자유화 민주화를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는데 노 대통령의 대북정책에서는 이를 찾아볼 수 없다”, “김 전 대통령은 통일 후에도 한반도에 주한미군이 필요하다는 말을 할 정도로 한미안보에 대해 확고한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노 대통령은 철학도 신념도 없이 한미 관계를 망가뜨렸다. 이라크 추가파병도 일본은 미국의 신뢰를 얻고 파병시간을 벌었으나, 우리 정부는 미국 기분을 상할대로 상하게 해놓고 보내는 시기는 일본과 같지 않느냐”고 당시 노무현 정부를 비판했다.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였을 때에는 한국일보에 "DJ - '사회복지 원년'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과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13회 동기 동창이며,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몇몇 일화를 살펴봐도 절친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자신의 빈소에 이건희 명의로 조화가 전달됐다. 그리고 4달 뒤, 이건희도 사망하면서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게 됐다.
2023년 6월에는 고인의 3주기를 맞아 생전에 남긴 책과 강연, 기고 등을 추려 엮은 '대한민국, 지금 잠이 옵니까?'가 출간됐다. 6월 7일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주호영 국민의힘 국회의원 주최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홍사덕 선거이력
1981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9
21,199 (14.78%) 당선 (2위)
초선
1985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영주·영풍·영양·봉화
35,828 (24.10%) 당선 (2위)
재선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 을
무소속
34,746 (30.39%) 낙선 (2위)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 을
64,201 (52.24%) 당선 (1위)
3선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강남 을
무소속
30,601 (26.06%) 당선 (1위)
4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7,365,359 (39.0%) 당선 (2번)
5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경기 고양 일산 갑
45,936 (46.61%) 낙선 (2위)
2005
하반기 재보궐선거
경기 광주
무소속
17,812 (30.85%) 낙선 (2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서
52,713 (61.77%) 당선 (1위)
6선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
36,641 (45.89%) 낙선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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